소크라테스 행복론


최용훈교수님 가톨릭관동대학교



서양의 행복론은 소크라테스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는 행복이 인간의 노력에 의해 얻을 수 있는 것이라 주장한 최초의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태어난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인들은 인간의 존재에 대해 비관적이었습니다. 행복이란 드문 일이고 신의 총애를 받는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죠. 따라서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은 자만으로 여겨졌고, 어떤 경우에는 혹독한 처벌에 직면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크라테스는 행복의 요체가 육신에서 관심을 돌려 영혼을 향하는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우리의 욕망들을 조화시켜 마음을 평화롭게 하면, 마침내 신과도 같은 평정함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죠. 더불어 삶은 도덕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더 행복한 삶을 향할 수 있기 때문이죠. 소크라테스는 미덕, 정의, 궁극적인 존재의 의미 등과 함께 행복의 개념이 서양 철학의 선두에 놓일 수 했던 것입니다.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Cicero)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을 하늘에서 떼어내어 지상에 내려놓았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철학은 주로 형이상학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었습니다. 예컨대 ‘왜 세상은 존재하는가? 세상은 하나의 물질로 구성되는가 아니면 많은 물질들로 이루어져 있는가?’하는 것이었죠. 하지만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서 벌어진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공포 속에서 살았던 소크라테스는 윤리적, 사회적 문제들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삶을 살아가는 최상의 방법은 무엇인가? 비도덕적인 사람들이 더 많은 이익을 얻는 것처럼 보여도 왜 우리는 도덕적이어야 하는가? 행복은 우리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인가 아니면 그것은 미덕의 행위인가?’

행복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세 개의 대화 속에서 드러납니다. 첫째는 에우튀데모스( Euthydemus)와의 대화: 알다시피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생각을 적은 글을 남긴 것이 없지요. 그의 제자 플라톤이 그와의 대화들을 모아 책으로 엮어냅니다. 에우튀데모스와의 대화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이 대화는 행복의 개념에 대해 언급한 서양 최초의 글입니다. 소크라테스는 2500년 전에 이미 오늘날까지도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되고 있는 행복이란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죠. 그는 두 가지 중요한 관점을 제시합니다:

1) 행복은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다. 왜냐면 그것은 모든 행위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2) 행복은 외부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들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려있다.

현명한 사람은 돈을 올바르게 사용함으로써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무지한 사람은 돈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낭비를 일삼아 결국 이전보다도 못한 삶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죠. 따라서 돈 그 자체는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돈은 조건적인 선(善) 일뿐이죠. 이는 모든 소유물이나 자질, 심지어 외모와 능력에도 적용됩니다. 잘 생긴 사람도 자신의 육체적 장점을 그릇되게 사용한다면 실속이 없거나 남을 속이는 인물이 될 수 있지요. 마찬가지로 지적인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더 사악한 범죄자가 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립니다.

“우리 모두는 행복하기를 바라고, 그것은 분명 다른 것들을 잘 사용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야. 지식이 이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모든 수단을 다해 이를 준비해야 해. 가능한 한 현명해지는 것 말이야.”

결국 행복은 우리 스스로 주어진 상황을 어떻게 이용하는 가에 달려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옳은 지식을 통해 현명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행복에 관한 소크라테스의 두 번째 이야기는 플라톤의 대화 중 ‘잔치’(The Symposium)에 등장합니다.

이 대화는 저녁 만찬 중에 시작됩니다. 사람들이 번갈아 가며 사랑과 욕망의 신 에로스(Eros)를 찬양을 하면서 행복에 관한 주제가 제기되었어요. 의사였던 에리크시마쿠스(Eryximachus)는 에로스 신이야말로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주장했죠. 희곡작가인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도 이에 동조하면서 에로스는 “인간을 도와주는 신으로... 에로스의 치유는 인류에게 가장 큰 행복을 가져다준다.”라고 말했어요. 에리시크마쿠스는 에로스야말로 인간의 욕망을 포함해 모든 것에 생명을 주는 힘이므로 선(善)의 원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편 아리스토파네스는 에로스를 남과 여로 갈라진 인간을 다시 결합하는 힘이라 보았지요.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에로스의 어두운 측면을 보았습니다. 에로스는 끊임없이 갈망하지만 결코 완전히 만족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죠. 그러므로 에로스는 완전한 신이 아니었습니다. 신은 영원하고 스스로 완전해야 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로스는 인간의 행복 추구에 중요한 존재였습니다. 왜냐면 그는 인간과 신 사이의 중개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에로스는 육체적 쾌락을 추구함으로써 시작되는 욕망의 힘이지만 마음의 더 높은 무언가를 추구하기 위해 절제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인간은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사랑에서 벗어나 아름다움 그 자체에 대한 순수한 사랑으로 옮겨가도록 교육될 수 있는 존재니까요. 그렇게 되면 인간의 영혼은 완전한 만족을 얻게 됩니다. 소크라테스는 이것을 일종의 환희 혹은 어떤 깨달음의 현현(顯現, epiphany)이라고 묘사합니다. 그 순간 사람의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고 비로소 인간 존재에 대한 진실을 보게 되는 것이죠.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인간의 삶이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아름다움의 핵심에 대한 비전을 얻게 될 때일 것이야. 일단 그것을 보게 되면 사람들은 결코 금이나 의복 그리고 육체적 매력 따위에 유혹당하지 않을 테니까. 숨을 멈추게 할 것 같던 이전의 아름다운 것들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되지... 진정한 아름다움을 식별하게 되면 우리는 가짜 미덕이 아닌 진정한 의미의 미덕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야. 누군가 이렇듯 완벽한 미덕을 낳고 키울 수 있다면 그는 신의 친구라 불리게 될 거야.”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이 신비한 환희 또는 현현이 주로 철학에 의해 얻어진다고 믿었던 반면 어떤 이들은 이 주제를 종교적, 미학적 측면에서 접근하기도 합니다. 기독교 사상가들은 신에 대한 순수한 비전을 가장 큰 행복으로 보고 있으며(토마스 아퀴나스), 어떤 이들은 음악이나 미술 속에 드러나는 아름다움의 비전을 통해 절대적 환희에 이른다고 믿었습니다.(쇼펜하우어) 어떤 경우에든 이 진리, 아름다움, 신성에 대한 압도적인 경험은 우리의 삶에서 겪는 모든 고통과 시련들을 의미 있고, 경험할만한 것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의 행복에 대한 생각은 플라톤의 ‘국가’(The Republic)에서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정의로운 사람이 불의한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했습니다. 에우튀데모스와의 대화에서 말했듯, 소크라테스는 모든 인간이 행복을 원한다면 공정하고 바른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그는 a) 행복의 정의, b) 쾌락과 행복의 관계, c) 쾌락과 행복 그리고 미덕(도덕) 사이의 관계에 대해 밝히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먼저 '육체의 건강'과 '영혼의 공정성'을 비교합니다. 우리는 당연히 건강을 원하지요. 그 건강이란 신체의 모든 부분이 제각기 적절하게 기능하면서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공정성이란 영혼의 모든 요소들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것이죠. 반면 소크라테스는 '불공정성'을 영혼의 각 부분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내전(內戰)’ 같은 것이라 보았습니다. 그것은 영혼의 한 사악한 요소가 이성(理性)에게서 지배력을 찬탈하는 반란인 것이었죠. 이와 대비해 공정한 영혼은 “정신적 조화”를 갖는 것입니다. 공정한 사람은 자신 앞에 무엇이 던져져도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고, 혹독한 환경 속에서도 평화와 고요함을 유지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소크라테스는 외부적 쾌락에 경도되었던 재래적인 행복의 개념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즉 행복은 외적인 것이 아닌 내적인 조화로움으로 정의될 수 있다는 것이었죠.

둘째로 소크라테스는 쾌락에 대해 분석합니다. 그는 도덕적인 삶을 사는 것이 그렇지 못한 삶보다 더 큰 쾌락을 준다고 말합니다. 이는 공정한 삶이 가져다주는 정신적 조화가 더 큰 내적 평화와 고요함을 준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도덕적이지 못한 삶이 초래하는 것은 내적인 불화와 죄책감, 스트레스와 근심 등 건강하지 못한 마음의 상태일 뿐이니까요.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삶 속에서 추구해야할 더 큰 쾌락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마음의 평화만이 아니고, 지식을 추구하는 흥분감 말입니다. 마음의 평화와 지혜를 추구하는 흥분감, 이 두 가지가 합쳐질 때 사람은 신과도 같은 상태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죠. 철학자는 이 추구의 정점에 있는 존재입니다. 무지의 눈가리개를 벗어던지고 더 높은 진리의 영역을 탐구하는 것, 그 경험이야말로 모든 육체적 쾌락을 능가하는 즐거움이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또 다른 주장은 소위 “쾌락의 상대성”입니다. 대부분의 쾌락은 전혀 진정한 쾌락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저 고통이 사라짐으로 얻어질 뿐이죠. 예를 들어, 병에 걸렸다가 갑자기 회복되면 그것이야말로 즐거울 수밖에요. 하지만 그것은 병의 고통이 완화되었을 뿐이므로 그 즐거움은 곧 사라지고, 그저 병들기 전의 상태로 돌아갈 뿐입니다. 우리의 쾌락이라는 것이 거의 모두 이와 같습니다. 그러니 진짜 즐거움은 아닌 것이죠. 또 다른 예를 들자면 마약에 의존한 쾌락입니다. 이는 단기간에 최상의 쾌락을 주지만 필연적으로 그와 반대되는 고통의 상태로 이끌고 맙니다. 물리적 쾌락은 이렇듯 상대적이지만, 소크라테스는 상대적이지 않은 쾌락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은 바로 육체적 상대성에 묶이지 않는 더 높은 영혼의 쾌락입니다. 이것을 ‘철학적 쾌락’이라 부릅니다. 다시 말해 현실에 대한 더 큰 이해에 도달하는 순수한 쾌락 말입니다.

수백 년 뒤, 에피쿠로스(Epikouros)라는 철학자가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이어받아 ‘육체적’ 쾌락과 ‘정신적’ 쾌락이라는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육체적 쾌락이란 고통의 제거에 따른 것입니다. 목이 마를 때 물 한 잔으로 목마름을 해소하는 것과 같은 것이죠. 하지만 정신적 쾌락은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 않는 조화의 상태, 즉 고통을 없애기 위한 육체적 쾌락이 더 이상 필요 없는 상태입니다. 육체적 쾌락은 계량화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먹는 것과 섹스 중 어디에 더 큰 쾌락을 느끼는가?’처럼 말입니다. 육체적 쾌락은 그 결과에 있어 언제나 실망스럽기 마련입니다. 왜냐면 현재의 쾌락이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게 만드는 더 높은 상태의 쾌락과 대비를 이루기 때문이죠.

반면 정신적인 쾌락은 계량화되지 않습니다. “지금 얼마나 배가 고파?”라는 식으로 물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에피쿠로스의 결론은 결국 진정한 행복은 정신적 쾌락의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욕망의 충족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부처의 가르침과도 닮아있습니다. 부처는 욕망을 끊어냄으로써 열반에 들 수 있다고 말했지요. 현대의 작가도 비슷한 경험을 한 것 같습니다. 독일 작가 에크하르트 톨레(Eckhart Tolle)는 “쾌락과 감정의 간섭이 없는 단순하고 고요한 상태”의 행복감을 이야기하고 있으니까요

결론적으로 소크라테스는 행복에 대해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 모든 인간은 당연히 행복을 원한다.

- 행복은 인간의 노력을 통해 얻을 수 있고 배울 수 있다.

- 행복은 외적인 물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그것들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려있다.

- 행복은 “욕망의 교육”을 통해 이루어진다. 인간은 그 욕망을 조화시켜 그것으로 하여금

물리적 쾌락에서 눈을 돌려 지식과 미덕을 향하게 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 미덕(도덕)과 행복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 결코 분리할 수 없다.

- 미덕과 지식을 추구하는 쾌락은 단지 동물적 욕구를 만족시킴으로써 얻는 쾌락보다 높은

상태의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행복을 '아타락시아'(ataraxia) 즉 '마음의 평화'라고 정의합니다. 그것은 육체적 쾌락이 아닌 정신적 쾌락을 의미했습니다. 행복은 결국 우리의 마음 안에 있는 것이겠죠. 소크라테스는 육체적, 물질적 쾌락을 추구한 당대의 행복관에 도전했습니다. 그럼으로써 후대의 철학에 보다 근본적인 행복론의 토대를 제공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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