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 ‘있는 일을 밝히다’

최용훈교수님 가톨릭관동대학교



한국 연구재단에서 지원하는 인문도시 지원 사업을 통해 금년 7월부터 강릉시의 인문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다양한 인문학 프로그램을 통해 지역 주민들의 인문학에 관한 이해를 증진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제 첫 강연의 주제는 ‘청소년을 위한 소크라테스’입니다. 너무 광범위하죠? 제목은 젊은이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테스 형, 세상이 왜 이래’라고 정했습니다. 다음 달 하순에 예정되어 있는데 소크라테스 얘기만이 아니라 포괄적으로 인문학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인문학적 소양을 키우기 위한 내용을 담고자 합니다. 스티브 잡스가 ‘소크라테스와 한 끼 식사를 함께 할 수 있다면 애플의 모든 기술을 다 주어도 좋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죠. 저는 인문학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던 이 기업인의 말은 소크라테스라는 특정인이 아니라 인문학 전체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강연을 위한 생각을 정리하다가 소크라테스에 대한 간단한 소개의 글을 몇 차례로 나누어 올려보고자 합니다.

‘소크라테스’라는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그 이름을 모르더라도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분명 어디에선가 들어보았겠죠.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단지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이다.’라는 말도 소크라테스의 말입니다. 그는 인식론과 윤리학에 천착한 고대 그리스의 사상가였습니다. 기원전 470-469년 사이에 그리스 아테네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기원전 5세기, 고대 그리스는 참으로 놀라운 시기였고, 위대한 장소였습니다. 특히 서양인의 시각에서 보면 더욱 그렇죠. 소크라테스는 서양 철학의 아버지로 여겨지고 있고, 그의 제자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도 다 같은 시대, 기원전 5세기의 인물들이었으니까요. 이 시대에는 역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헤로도토스(Herodotus),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등이 생존했던 때였고, 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피타고라스(Pythagoras)는 바로 전인 기원전 6세기의 인물이었습니다. 이렇듯 이 시기의 그리스는 서양의 학문과 사상의 시발점이 되었던 아버지(?)들의 시대였던 것이죠.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시대의 대표적 인물이었고 예수, 석가모니, 공자와 더불어 인류의 4대 성인이라 불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가 성인의 반열에 오른 것은 그가 추구했던 학문과 사상의 근본적인 목적 때문일 것입니다. 소크라테스 철학의 핵심은 ‘있는 일을 밝힘’으로써 사람들에게 옳고 그름을 가르치려 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로써 그는 동서고금을 통해 인류의 스승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지요.

소크라테스는 육체적 아름다움보다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그 자신의 외모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의 제자였던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신이 되지 못한 것은 그의 추한 모습 때문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작은 키에, 눈은 튀어나왔으며 들창코였다니까요. 소크라테스는 귀족 가문의 출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공적인 교육은 거의 받지 못했고,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에게서 석공 일을 배웠습니다. 가난했기 때문에 철학자가 되기는 어려울 것임을 알고 있었죠. 그의 어머니는 아이 낳는 일을 도와주는 산파였습니다. 사실 그는 상당한 기간을 석공으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물론 타고난 학문적 재능으로 나름 공부를 했고 타고난 선생님의 기질로 젊은이들을 가르쳐 돈을 벌기도 했지요. 그는 거리에서 제자들을 모아놓고 자신의 가르침을 베풀었으니 오늘날 이야기되는 ‘교실 없는’ 교육의 선구자인 셈입니다.

소크라테스는 그리스의 신들을 믿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는 젊은이들을 종교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있다는 이유로 많은 적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는 아테네에서 인정하지 않던 ‘다이몬’(daimon)이라는 존재를 믿었는데 이로써 신에 대한 불경죄가 적용되어 처형을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 신을 숭상했던 아테네 인들에게 신은 창조된 존재였지, 세상을 창조한 존재는 아니였죠. 그들에게 신은 무한한 힘을 탐하는 절대적 존재였을 뿐입니다. 그래서 신들은 세상일에, 인간의 삶에 그들의 기준으로 간여하게 되었고, 인간은 그러한 신들의 힘과 분노에 눌려 그들을 위무하기 위해 희생물과 제례를 올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신에 대한 그러한 관념을 믿지 않았어요. 그는 신이라는 존재는 자비롭고, 존경할 만하며, 합리적이고 현명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이러한 점에서 보면 소크라테스는 현대적 종교 사상의 선지자라 칭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위대한 스승이었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외에도 역사가이며 사상가였던 크세노폰(Xenophon), 그리스의 위대한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를 가르쳤고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이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지식을 글로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묻고 답하는 문답의 형식으로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그저 날마다 깊은 사색과 추론의 시간을 보냈을 뿐입니다. 그의 가르침은 이후 플라톤과 크세노폰에 의해 기록으로 남겨지게 됩니다.

소크라테스에게는 분명한 신념이 있었습니다. 그 것은 바로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이었죠. 이 말이 뜻하는 바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을 깊이 성찰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질문을 던지고 제자들로 하여금 답을 이끌어내도록 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사고의 정확성과 완전성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던지도록 함으로써 제자들로 하여금 궁극적인 답을 얻도록 이끌었던 것입니다.

전쟁은 소크라테스의 가르침과는 크게 어긋나는 것이었죠. 하지만 그는 의무적으로 군사훈련을 받고 스파르타와의 대결이었던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참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한 전투에서 이후 아테네의 지도자가 된 알시비아데스 장군의 생명을 구했던 것으로 알려지기도 하였습니다. 위대한 사상가의 삶도 역사의 커다란 흐름에서 비켜서 있기는 어려웠던 것이지요.

소크라테스는 사상적인 측면에서 고대 그리스의 직접 민주주의에 대해 회의적이었습니다. 그는 ‘이상(理想, ideals)은 현명한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세상 속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다수에 의한 정치를 우민 정치(愚民政治)로 보았던 것이지요.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그가 민주주의자였음 보여주는 사실들이 발견됩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스파르타의 영향 하에서 아테네의 잔혹한 과두정치가 이루어지던 시절, 군인이었던 소크라테스는 사형 선고를 받았던 민주적인 지도자 레온 장군의 체포를 거부하였습니다. 또한 그 자신이 70세의 나이에 처형되기 전, 친구들이 간수에게 뇌물을 주어 그를 탈옥시키려 했을 때, 그는 자신이 민주주의의 법률에 따라 살아왔음을 상기시키며 기꺼이 죽음을 맞이했지요. ‘악법도 법이다.’라는 그의 말은 민주적 법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었습니다. 하기는 그가 탈옥을 통해 사형을 모면하였다면 오늘날 누리는 위대한 사상가로서의 면모는 많이 훼손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Xanthippe)는 역사 상 가장 유명한 ‘악처’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녀와의 사이에 세 자식을 두었던 소크라테스는 공공연한 양성애자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젊은 남자에게 매력을 느꼈다고 하는데 육체적인 측면보다는 그들의 순수한 영혼에 매료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앞서 이야기한 알시비아데스 장군과 사랑에 빠지기도 했었죠. 하기는 이 시절의 남색(男色)은 크게 비난받을 일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양성애자에다가 하루 종일 사색에 빠지고 젊은 제자들과 관념적인 질문에 시간을 보내던 남편에 대한 크산티페의 불만도 이해할만하다 할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위대한 사상가였지만 인간적인 면에서는 매우 흥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이 기회를 통해 그의 삶이 그려냈던 궤적을 찾아보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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