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와 민주주의

최용훈교수님 가톨릭관동대학교



우리는 민주주의를 인류가 만든 최고의 정치체제로 믿고 있습니다. 주권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생각은 절대 왕권이나 독재의 학대 속에 살았던 다수의 민중들에게는 천상의 소리로 들렸겠지요.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대중들의 직접 참여로 이루어졌습니다. 계급이나 출신과 상관없이 누구나 자신들의 대표를 뽑고 정책에 대한 견해를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귀족들에 의한 원로원이 있었지만 백성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호민관 제도도 역시 존재했습니다. 이러한 초기 민주주의 정신은 대의제(代議制)의 간접 민주정치로 바뀐 오늘날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습니다.

정치가들은 누구나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권력을 얻은 후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대중의 요구에 귀를 닫는 사이비 정치가들이 판을 칩니다. 대중들은 누구를 뽑아야 진정한 민주정치가 구현될 수 있는가를 놓고 수많은 정보들 속에서 혼란에 빠집니다. 민주주의는 그 정신의 고귀함에도 불구하고 그 실천에 있어서는 아직도 부족한 점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날 사이버 공간을 통한 직접민주주의의 귀환을 얘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수많은 찬성과 반대, 상대에 대한 무차별적 중상모략과 천박한 비난들 속에서 건전한 상식을 갖은 국민들조차 올바른 선택의 방향을 가름하기 쉽지 않습니다.

2500년 전,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정치 실상을 보면서---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민주주의의 위험성과 불완전성에 문제를 제기하였습니다. 그는 당대 민주주의의 전 과정에 회의적이었습니다. 플라톤의 ‘국가’ 제6편에서 소크라테스는 아데이만토스(Adeimantus)와의 대화 속에서 국가를 배에 비유하며 민주주의 결함을 설명합니다.

소크라테스가 묻습니다.

“바다를 항해할 때, 어떤 사람을 선장으로 삼겠는가? 아무나? 아니면 항해에 필요한 지식과 규칙을 제대로 배운 사람?”

아데이만토스가 대답합니다.

“당연히 후자지요.”

“그렇다면 누가 국가의 통치자가 되어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왜 아무나에게 그 판단을 맡겨도 된다고 생각하는가?”

소크라테스의 질문 요지는 지도자를 뽑기 위한 투표는 직관에 의해 멋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기술이라는 점이었죠. 다른 모든 기술처럼 투표의 방법은 국민들에게 체계적으로 훈련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훈련 없이 투표하게 하는 것은 낡은 배로 폭풍우를 헤치고 머나 먼 사모스 섬으로 항해하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 생각했죠.

소크라테스 자신도 그런 어리석은 투표의 해악을 몸소 겪게 됩니다. 기원전 399년, 그는 아테네의 젊은이들을 부패시키고 있다는 혐의로 재판에 넘겨집니다. 그 재판을 위해 500명의 배심원단이 구성되었고, 그들의 투표에 의해 근소한 차이로 사형선고를 받게 됩니다. 물론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법과 체제를 거부하지 않고 결정에 승복했지만, 그는 편협한 사람들은 결코 어떠한 투표도 해서는 안 된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석공의 아들로 태어났으니 결코 소수의 엘리트 집단에 속해 있지는 않았죠. 하지만 그는 합리적이고 깊이 있는 사고를 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투표를 해야 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지성적 민주주의와 생득적 민주주의 간의 차이인 것이죠. 사실 우리는 투표가 지성적 행위임을 간과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소크라테스의 말대로 멋대로의 직관이나 피상적인 느낌으로 인기투표 식 투표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투표가 어떠한 결과로 이어질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누구도 바라지 않는 선동정치, 대중의 무분별한 기호에 영합하는 포퓰리즘 정치를 부를 뿐이라 생각했던 것이죠.

고대의 아테네도 그러한 선동정치를 경험한 바 있었습니다. 알키비아데스는 한때 소크라테스가 사모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부유했고, 부드러운 가운데 카리스마가 있었던 지도자였지만 결국 백성들의 자유를 억압하고 아테네를 시실리에서의 무모하고 재앙과도 같은 군사 행동으로 내몰았던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선거에 나선 정치가들이 얼마나 쉽게 편안한 해결책을 찾는 사람들의 욕망을 이용할 수 있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무작위의 대중은 무책임한 감상주의에 빠지기 쉬운 대상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또한 선거에 나선 두 후보 간의 토론을 상기시킵니다. 한 후보는 의사이고 다른 한 사람은 사탕가게 주인이었어요. 사탕가게 주인은 상대 후보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은 여러분들에게 못되게 굴어왔죠. 치료랍시고 아프게 했고, 쓴 약을 주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것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게 했어요. 그는 결코 잔치도 벌이지 않을 것이고 여러 가지 즐거운 것들을 베풀지도 못할 겁니다. 나는 할 수 있어요.”

의사는 무어라 대응할 수 있었을까요? 그의 다음과 같은 주장은 과연 대중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을까요?

“나는 여러분들에게 고통을 주었습니다. 욕망을 억제하도록 시켰죠. 여러분들을 돕기 위해서 말입니다. “

인간이 내일의 즐거움을 위해 오늘의 즐거움을 포기할 수 있을까요? 다수의 군중들에게 의사 후보자의 말은 혐오만을 안겨줄지 모릅니다. 내일을 위해, 미래를 위해 오늘의 고통을 감수하자는 얘기는 정치적 구호로는 공허할 뿐입니다. 오늘의 시점에서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경고를 상기해야 합니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무결함의 제도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인류가 만든 최선의 것이고 효율적인 제도이지만 영구불변의 절대 진리는 아닐지도 모릅니다. 의사가 아닌 사탕가게 주인을 선출하는 한에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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